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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_Other

공부 공부 _ 엄기호

by pub-lican-ai 201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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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늙을수 있을까? 제대로 늙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사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공부가 제대로 도움이 되지 않고 내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면서 '타석에 들어서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 구실을 하고 있다.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 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온 천하를 얻으면 무엇하나.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데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냐 세상과의 화해냐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공공선이 되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

 

역사속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훌륭한 사람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함을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더불어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교육현장에 기쁨은 사라지고 재미만 남는 것이 개탄스럽다. 공부에 지쳐 공부를 해치우는 것으로 여길수록 성장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습관처럼 뭐 재미있는 일 없나하고 게임도 웹툰도 하나도 기뻐하지 않은채로 순간적인 재미로 피식거리며 하는 것 같다. 재미와 기쁨은 엄연히 다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하는 강박을 갖는다. 이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더 합리적이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은 영원한 숙제로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장의 숙제로 찾아보고자 한다

 

학교가 '교육의 약속'을 통해 만드는 것은 바로 몸이다.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써 지루함을 견디는 몸을 만들어 간다.

사회가 예측 가능하고, 그에 대한 믿음 속에서 자기 삶을 기획할 수 있으며, 그 기획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일 때,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공부가 재미없고 지루하며 지금 당장 나를 솔깃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일이 있어도 참고 앉아서 공부를 할 수 있다.

학문은 과정의 연속이고 멈추면 퇴보한다는 말도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공부를 견디는 몸은 곧 정신력을 의미한다.

 

나의 한계를 아는 것. 자기를 배려하는 것. 주어진 재능을 확인.

한계를 알려면 '충분히 해보아야 한다' 여기서 충분히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일을 하는 것이 행복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 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수 있는 힘'이다.

 

사람이 이해하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란 곧 자신의 욕망이다. 나와 욕망을 동일시 하는 순간 욕망이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욕망에 끌려다니는 노예로 전락한다.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으로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자기 배려의 중요한 원칙은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라는 것이다."오직 모를 뿐" _ 숭산큰스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 너 자신이 모르는게 무엇인지를 알라 - 너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알라 - 무지 중의 무지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면, 그 무지의 왕이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다 - 내가 내 자신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게 중요하다.

존 듀이가 말하는 성장과 배움 이론  -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 지에 관한 앎이다.

내가 기쁨을 느낄 때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을 때 오직 인정 받을 뿐. 가르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오직 부딪칠 뿐 - 때떄로 사람들은 '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 '하는 것'에서 '겪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체험의 과잉/경험의 빈곤에 시달린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게 타자라고 하면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 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 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이들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걸 말이다. 3대 마왕인 이유는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타자의 끝판왕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한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성찰과 예측이 바로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다. 자기 삶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을 축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관 짓는다는 것이다. 그 연관성을 파악하고, 파악한 바에 따라 행동해 상황으 통제할 수 있을 때 공부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공부를 계속할 힘을 얻는다. 공부의 힘이 주는 쾌감을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지적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다면 연관 짓지 못할 것을 연관 지음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기량이 늘어나는 데서 온다.

존 듀이 - 끈질기게 일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은 흥미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사로잡는가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 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이런 걸 느껴본적이 있다. 

'생각 하는 손' - 리처드 세넷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 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룰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꿈꾸는 자유는 그저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라는 공허한 바람에 불과하다. 활용이 없는 자유, 다룸이 없는 자유를 꿈꾸지만, 이런 자유는 불가능하다.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익히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때, 내 몸에 익혀지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이것이 있어야 우리는 능수능란함에 도달할 수 있다. 

공부의 길로 이끄는 것은 경탄, 경악, 경이 다. 와~ 악~ 이다. 

그는 별을 아는 것을 넘어 향유하고 있었다. 공부의 목적은 이 향유하는 힘을 키우는데 있다. 기하학을 모르면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다.

 

배우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공부를 통해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잘 늘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공부를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특히 그가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 지에 집중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자 할 뿐이다. 놀랍게도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 

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공부에 바빠 공부를 잃은 이들에게, 따비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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